강남의 한 노래방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은 낡았고, 엘리베이터에서는 담배와 레몬 라임 냄새가 진동했으며, 위층 복도는 두 사람이 옆으로 비켜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 알아듣지 못하는 노래를 합창하듯 부르며 가사를 주고받았다. 내가 꼴사납게 서 있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는 얼어붙은 채 잠시 서 있었는데 강남가라오케 , 손에 클립보드를 든 여자가 몇 시간 예약했냐고 물었다. 나는 몇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내게 팁을 주고 복도를 가리켰다. 여기까지가 시작이었다.
그곳은 사실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카운터, 가장 낮은 진열대,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디스플레이 화면, 그리고 편리한 리모컨까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무언가 달라졌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졌다. 밤의 압박감, 회의, 이메일, 수많은 자잘한 대화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악보와 악기만 가지고 홀로 서 있었다. 악기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아무 곡이나 골랐다. 오래되고 느린 곡이었다. 그리고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첫 소절에서 말이 끊겼다. 후렴구 중간쯤부터는 가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 숫자는 54였고, 화면에는 어설프게 번역된 언어로 “당신은 훌륭한 마음을 가졌지만 훈련이 필요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때 비로소 나는 한국에서 왜 그렇게 노래방이 중요한지 깨달았다. 노래방은 노래 실력을 뽐내는 곳도, 완벽한 공연을 보여주는 곳도 아니다. 그곳은 그저 감정을 쏟아내는 공간이다. 사회적 압박이 거세고 늘 절제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곳에서, 노래방은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있어도 허용되는 드문 장소다.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되고, 슬픈 발라드의 MIDI 반주에 맞춰 마이크를 붙잡고 슬픔을 토해내도 된다. 목이 쉴 때까지 록 음악을 고래고래 불러도 괜찮다. 벽이 얇아 옆방에서 누군가 똑같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 소리는 오히려 위안이 된다.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드러내는 게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후 몇 주 동안 나는 노래방의 단골이 되었다. 직원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어떤 방의 음향 시설이 가장 좋고 어떤 방이 최악인지도 파악했다. 지하철역 근처의 동전 노래방은 저렴하고 북적거리는 분위기로 십 대와 여행객들로 붐비는 반면, 위층의 고급 노래방은 조용하고 비싸며 직장인이나 데이트하는 커플들이 찾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두 곳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그 모두가 강남의 모습이었다. 나는 친구들과도 노래했고, 낯선 사람들과도 노래했다. 직장을 그만둔 여성, 막 결혼한 남성과도 함께 노래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에너지와 노래, 그리고 그곳에 온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방이라는 공간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무엇보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노래가 끝난 뒤 찾아오는 고요함이었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고 나서 몇 초간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화면에는 노래 점수가 표시되었지만, 아무도 그 점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공간은 고요했고, 그 정적 속에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어떤 진정성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노래를 부르든, 혹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노래를 부르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을 지켜봐 주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가사와 실수, 그리고 당신이 쏟은 노력을 모두 알아봐 주었고, 여전히 그 자리에 함께해 주었습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전부나 다름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서울처럼 거대하고 분주한 도시에서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봐진다는 것은…